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드라르 왕조 (문단 편집) === 파티마 조의 1차 침공 === 한편 그 무렵 동쪽 이프리키야에서는 일곱이맘파 쉬아 운동인 파티미야 혁명의 불길이 일고 있었다. 그의 정신적 지도자인 [[압둘라 알 마흐디]]는 시리아에서 이집트를 거쳐 마그레브로 향하였는데, 905년 (예언대로) 시질마사에 당도하였다. 압둘라 일행은 정체를 숨긴 채로 아미르 야사 이븐 미드라르와 친분을 맺었고 자신처럼 동방에서 온 이들과 함께 머물렀다. 다만 (전설에 의하면) 압둘라의 아들 알 카임이 샘이 솟아나게 하는 기적을 행하자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고, 현지 유대인이 압둘라가 지배권을 탈취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동시에 압바스 칼리파가 야사에게 서신을 보내 압둘라 부자와의 친교를 끊으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야사는 압둘라 부자를 감금하였다. 다만 압둘라의 환관들 중 한명이 탈출하여 [[카이로우안]]에 있던 파티마 혁명군 사령관 앗 쉬이에게 비보를 알렸고, 앗 쉬이는 서쪽으로 행군하였다. 도중 이바디 카와리지파를 신봉하는 루스탐 왕조를 멸한 앗 쉬이는 시질마사에 당도, 압둘라 부자를 구출하였다. (909년 8월) 야사는 도주하였지만 추격당하여 살해되었고, 풀려난 압둘라는 시질마사를 약탈하였는데 도중 자신을 고발한 유대 공동체에게 가혹히 대하였다. 본거지인 튀니지로 향하며 압둘라는 시질마사에 총독을 임명하였고 (약탈로 얻은) 낙타 120마리에 실은 금과 함께 폐허가 된 도시를 떠났다. 50일이 지난 후 시질마사 주민들이 봉기하여 파티마측 총독을 축출하고 야사의 조카 와술을 아미르로 추대, 독립을 되찾았다. 913년 와술이 사망한 후 동생 아흐마드가 계승하였는데, 921년 파티마 조의 속국인 루스탐 조가 시질마사를 공격하였다. 아흐마드는 그에 맞서던 중 전사하였고, 루스탐 군대는 성벽을 넘어 시질마사를 함락하였다. 이후 그들은 허수아비 군주들을 옹립하였고 파티마 주화를 발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